[토닥토닥 인문학] 여러분은 ‘인생 배치도’를 갖고 계신가요?

Story/효성


‘좌석 배치도에서 원하시는 자리를 선택해주세요’, ‘직원 여러분께서는 팀별 자리 배치표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공간별 가구 배치 팁’, ‘인테리어 고수의 소품 배치 노하우’, ···.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표현들이죠?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우리 주변엔 참 많은 것들이 ‘배치’돼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참 많은 것들을(심지어 사람까지도!) ‘배치’하면서 생활한다는 것도요.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어떻게 배치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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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효성에 입사했다 = 효성이 내 삶에 배치됐다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겠습니다. 텅 빈 새집으로 방금 막 이사했습니다. 거실엔 짐들이 가득 쌓여 있고요. 이제 하나하나 꺼내야겠죠. 꺼낸 다음엔 집 안 곳곳마다 두어야 합니다. 세면 도구들은 화장실에, 옷들은 옷장에, 신발은 현관 신발장에, 요리 용품들은 주방에, ···. 새집으로 이사해 짐을 풀고 정리하는 이 모든 과정이 ‘배치’입니다.

 

쌓여 있으면 짐이지만, 배치되는 순간 인테리어가 되죠.
우리 삶에도 ‘배치되기를 기다리는’ 요소들이 많답니다.


한 사람의 삶도 이러한 ‘배치’의 연속 같습니다. 갓 태어난 순간의 사람은 마치 텅 빈 새집 같은 상태죠. 점차 성장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저런 의식주, 소지품, 소중한 인연 등등이 우리 곁(안)에 채워지고요. 집 안에 다양한 물건들이 배치되듯 말예요. 즉 우리의 현재 모습은 ‘다양한 배치의 결과’인 셈입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나는 새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새 스마트폰이 내 일상에 배치됐다.


나는 효성그룹에 입사했다.
→ 효성그룹이라는 회사가 내 삶에 배치됐다.


올해 큰 계약을 성사시켜 ‘자랑스러운 효성인 상’을 받았다.
→ 큰 계약을 성사시킨 경험과 ‘자랑스러운 효성인 상’이란 값진 결과물이 내 인생에 새롭게 배치됐다.


이처럼 우리는 배치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거나 발전합니다. 배치는 인문학에서도 무척 중요한 개념이에요. 배치를 인문학 용어로 끌어올린 인물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그의 저서들은 웬만한 전공자들도 해석에 애를 먹을 만큼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데 정작 들뢰즈 본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철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책을 금방 이해했다고요. 지식과 교양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과 삶을 토대로 철학을 이해해보라는 뜻 아닐까 싶네요.


배치는 프랑스어로 ‘Agencement(아장스망)’이라고 하는데요. ‘조립’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배치가 인문학적으로 중요한 까닭은 ‘생성’을 이루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우유에 유산균이나 유기산을 넣어 발효시키면 응고되기 시작하죠. 완전히 응고된 우유, 즉 응유에 열을 가하고 알맞은 모양으로 자른 뒤 숙성시키면 치즈가 됩니다. 액체였던 우유에 유산균, 유기산, 열기, 숙성 과정이 배치되면서 치즈가 생성된 셈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또한 무엇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지금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개개인에게 주어진 이 생성의 힘! 그 힘의 시작점이 바로 ‘배치’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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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 어디에 나를 배치할 것인가


앞서 ‘우리의 현재 모습은 다양한 배치의 결과’라고 표현했었는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는 배치도 있게 마련입니다. 가령, 집안 어르신 중 한 분이 대뜸 맞선 자리를 잡았다며 내게 시간과 장소를 통보한다면..?! 이때 나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정중히 거절할 수도 있고(승진시험 준비 때문에 연애할 시간이 없어요~), 설렘을 안고 맞선 장소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한 번 만나는 볼게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배치의 종류는 전혀 달라지겠죠. 승진의 배치(맞선 안 나가길 잘 했다), 승진시험 불합격의 배치(이럴 줄 알았으면 맞선이나 볼 걸), 맞선 성공의 배치(오늘부터 1일!), 맞선 실패의 배치(승진시험도 맞선도 다 불합격..) 등등.


이 예에서 눈여겨볼 점은, 내가 어떤 배치를 더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이 ‘승진의 배치’인지, ‘연애(연인)의 배치’인지를 판단하는 거죠.


소설가 이외수 씨는 한때 쇠창살 안에서 집필을 했다고 합니다. 고물상에서 감옥 철창을 구입해 집에다 설치하고, 자물쇠를 문 바깥 쪽에 달았다고 해요. 원고를 다 쓰기 전까지는 절대 스스로 문을 열지 못하게 한 거죠.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가둬놓은 겁니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가열하게 글을 써보려 선택한 방법이었다는군요.


“자물쇠의 위치 하나만 바꾸는 것으로도 침실의 배치는 감옥의 배치로 바뀝니다.”

_ 이진경 저 <노마디즘 1> 중


자물쇠를 방 안에 거느냐 밖에 거느냐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뜻입니다. 물론, 미래도 달라지겠죠. 이외수 씨는 ‘감옥의 배치’를 3년간 유지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완성한 소설이 <벽오금학도>입니다. 이 작품은 출간 3개월 만에 120만 부 판매를 기록했다고 하죠.

 

잠금장치를 안에 배치하느냐 밖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공간의 본질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무엇을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지금 내 주변은 어떤 배치들로 채워져 있는지. 지금 내 주변에 배치된 것들은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 것인지. 지금 내게 필요한 새로운 배치는 어떤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며 나만의 ‘인생 배치도’를 그려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