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석 부자의 보물을 보자! 일반인은 관람이 불가능한 간송미술관은 어디?!

2012. 10. 4. 18:37

 

 

 

 


안녕하세요 여러분 :-)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블로그지기는 연휴 후유증으로 아직도 헤롱헤롱 @_@ 그래도 이틀만 지나면 주말이라는 생각에 불끈! 힘을 내봅니다 ㅎㅎ 여러분은 주말 계획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번 주 주말에 미술관을 방문할 예정이에요. 전 교양있는 뇨자니까요! 으히이히이히히히이히히히>0< 제가 방문할 미술관은 바~로! ‘간송미술관’입니다. 문화생활에 조금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들어본 적 있으실텐데요, 일년에 봄과 가을 단 두 차례만 전시되기에 그 관람에 대한 욕구가 더 치솟는 듯 해요. 평소엔 일반인의 관람이 불가능 하다는 간송미술관! 과연 그 곳은 어떤 곳일까요? 오늘 우리 함께 알아보아요^^
 

 

 

 

 

 

 

 

 

 

간송 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박물관입니다. 성북구 성북동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한 그~곳! 고 전형필 선생이 1938년에 설립 하셨죠. 여기서 잠깐! 전형필 선생님은 과연 누구일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ㅜㅜ) ‘한국의 키다리아저씨’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ㅎㅎ 아무런 조건 없이 고아인 주디 애버트를 후원했던 키다리 아저씨처럼 간송 전형필 선생님도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셨기 때문이에요. (머..멋있어ㅜㅜ) 우리가 TV 드라마에서 보는 것 처럼 소위 말하는 갑부 들이 부(富)의 과시를 위해 문화재를 사들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문화재를 수집하여 보관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간송 미술관에 전시된 ‘혜원전신첩’ 中

 


전형필 선생님은 불과 24세의 나이로 현시가로 6천억 원(허….어..억…억!! 6천..억!! -0-)이상에 해당하는 800만평의 논을 소유한 행운아였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재산을 가졌다고 축하만 할 수는 없는 이유는 친조부, 양조모, 양조부, 친조모, 양부 및 친형 등 집안 어른의 줄초상으로 인해 기와집 2천 채 상당의 가치가 있는 친부와 양부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이코;;;;) 첫 아들의 사망에 이어 그 다음해에는 친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불행한 상황이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죠. 만약 다른 상속자 (친형)가 살아있거나 친부가 장수했다면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땅에서 울고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렇게 한국 최초의 민간 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은 간송의 일가의 죽음을 대가로 이루어진 셈이죠. ㅎㅎ 

 

 

 


 


 

 

이후 간송은 문화재 수집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요. 사실 간송 외에도 조선에는 많은 수집가들이 존재했지만 왜 간송만이 칭송 받고 있는 걸까요? 해방에 대한 의구심으로 수장품을 일본에 처분하고 아편 중독자가 된 유방 김찬영이나, 2캐럿짜리 다이아반지에 넘어간 부인의 ‘베갯머리송사’에 명품 조선백자를 일본인에게 넘긴 창랑 장택상 등 한국의 수장품을 지키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지만 간송의 스승인 위창 오세창 선생님의 한마디 말씀 덕택에 지금 우리가 간송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시물들을 지켜냈답니다.

“수장가에게는 모으는 일보다 지키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려운 게야”

 

 

 

 

 

 


간송 미술관이 유명한 첫 번째 이유! 일 년에 단 두 번, 개방이 되는 미술관이기 때문이에요. 일반인에게는 평소에 관람이 허락되지 않으며 5월과 9월 중순 경 약 2주간 개방이 된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품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서라고 해요. 그러니 평소에 보고 싶어도 우리 조금만 참아욧 +_+ 사실 더 자주 열어달라는 아우성이 엄청나긴 하지만 간송 미술관은 연구소에 부속된 박물관으로 연구가 주 목적이고,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검증 받자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시 시기, 기간 등은 여기를 후원하던 당시 최고의 학자들이 보존까지 고려해 결정한 일이라 40년간 철저히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사실 관람을 위해서는 1-2시간 줄 서는 것은 기본이고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 가면 더 긴 시간을 대기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방문 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간송 미술관 만큼 도심 속 한적하고 운치 있는 곳이 흔치 않다는 이유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네요. 그렇지만 간송미술관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 정말 그 이름만 들어도 감동이 밀려오는 대단한 분들의 작품이 가득한 유서 깊은 미술관이기 때문이죠. 그 작품 함께 감상해 볼까요?

 

 

 

 

 

 

1. 훈민정음 해례본 (1446년/ 국보 70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뜻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목판본으로 세계기록 유산입니다. 간송미술관은 민간 미술관이지만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 하나이죠. 특히 알려진 문화재로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고려청자], 신육복의 [미인도]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훈민정음]이랍니다.
 

 

 

 

 

 

 


1942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은 해례본은 본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광산 김씨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이를 종가에서 가지고 나와 간송 전형필에게 판매했다고 해요. 당시 한가지 일화를 말씀 드리자면 이용준은 최초 판매가격으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간송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만원을 지불했다고 해요. 당시 천원이면? 정말 좋은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하니 만원이라면 집이 10채네요; 어마어마 하죠잉~? 이 후 [훈민정음]은 국보 70호에 지정되었답니다.

 

 

 

2. 고려청자

간송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고려청자 20점은 매우 훌륭한 작품들로 유명하죠 ^^ 모두 국보급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 이들 작품들은 본래 개츠비(Gatsby)라는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작품들이었지만 간송의 문화재 사랑에 감동한 개츠비가 일본인 딜러를 통해 간송에게 판매했다고 합니다.

 

 

 

 

 

 

고려 청자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기의 작품이 가장 완성도가 높고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간송미술관은 이 시기의 청자들을 다수 보유 하고 있답니다. 국보 제 65호 [청자기린형향로], 국보 66호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국보 270호인 [청자원숭이형연적] 등 다양하지만 그 중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청자상감운학 문매병] 이랍니다. 이 작품은 국보 68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표현 할 수가 없다는 저~~엄~~* 꼭 한번 만나보시길 강추강추 >_<

 

 

 

3.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中 단오풍정 / 미인도
 

 

 

 

혜원은 걸작을 여럿 남겼는데 특히 전신첩은 조선 풍속화의 백미로 꼽힌답니다. 간송은 30점의 걸작이 담긴 이 화첩을 수년여에 공들인 끝에 사들였다고 해요. 바위 틈에 숨어 속살을 훤히 드러낸 여인들을 훔쳐보는 두 동자승의 표정이 보이시나요? ^^; 이 작품에 생생함을 불어넣고 있는 듯 하네요. 

 

 

 


 


 

 

명주실 처럼 가늘되, 철사처럼 탄력있는 세금선으로 풍류계 여인(기생)의 자태를 요염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탐스럽게 얹은 머리에 젖가슴이 드러날 만큼  짧은 저고리에 비해 열두폭의 치마는 풍성함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쪽빛 치마자락 밑으로 살짝 드러나 외씨 같이 하얀 버선발과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가닥의 허리끈 까지. 붓끝에서 어찌 이러한 여인이 그려진 건지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4. 불교미술품

간송미술관에는 매우 주요한 불교 미술품들도 가득하답니다. 국보 73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삼존불감]은 간송 미술관의 대표적인 불표 미술품으로써 도금된 청동불감입니다.

 

 

 

 

 

 

 

 불감은 불상을 뫼시기 위해 나무, 돌, 쇠 등으로 만든 작은 구조물로서 당시의 건축 양식과 유행스타일을 연구하는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죠. [금동삼존불간]은 18센티미터의 작은 불감이지만 청동으로 불상과 불감을 만든 후 금도금을 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주목 받고 있답니다. 아직도 그 금빛이 선명하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반짝반짝 +_+ 이 외에도 정말 입이 떡~벌어지는 작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참고 : 테마로 보는 미술 : 세계의 미술관 네이버 캐스트)

 

 

 

 

▲ 최북, [석림묘옥도], 조선후기

 

 

▲ 김홍도, [빨래터] 18세기

 

 

어떠셨나요? 간송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얼마나 엄청난 매력을 가진 곳인지 조금이라도 느끼셨나요? 조선시대 문화 르네상스 시기인 17-18세기 진경시대 회화를 감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비록 유리관을 통해서이지만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고미술의 매력을 감상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봄과 가을 이 곳을 “꼭” 찾는 이유가 되는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간송미술관을 더 맛깔나게 즐길 수 있는 Tip을 알려드릴게요! 끝까지 친절한 김대리 ^^v


Tip1. ‘간송 전형필’ 책을 읽고 간다!
Tip2. EBS 역사 특강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보고간다. 
http://home.ebs.co.kr/historylecture/index.html
방송 2012.4.30- 2012. 5.29 매주 월/화
Tip3. 조금 덜 붐비는 평일 오전시간에 방문하자!
Tip4. 주위 볼거리도 함께 챙기자!
 

 


 

간송미술관 전시와 함께 주변의 문화재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요. 이번 주 주말, 우리 모두 간송미술관에서 만나요^^

 

 

 

 

  1. 작성자 대표 이미지
    2012.10.06 14:53
    올해 10 월 에는 언제 개방이 되나요?
  2. 작성자 대표 이미지
    虛像
    2017.02.08 17:33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지인들이 쓴 소설에 불과합니다.
    진실은 기존에 알려진바와 같이 아래와 같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28년 1446년 간행) 간송본은 안동의 진성이씨 주촌(두루) 대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씨가 두루 종택의 작은집 이한걸의 아들인 이용준으로부터 구입하였으며,
    일부 긍구당 지인들이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근거도 증거도 없는 추측 및 왜곡일 뿐이고 주장한 내용도 추측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해례본을 긍구당에서 소장한 기록과 입수한 근거가 전혀 없고 이에 대한 설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명도 없습니다. 즉 허구이지요.
    또한 결정적으로 긍구당의 역사는 유일재 김언기 (金彦璣 1520~1588)로부터 시작되며 世宗임금(1397~1450) 사후 70여년 지나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더구나 60여년동안 일체의 언급이 없다가 관련자들이 다 돌아가시고 마지막에 남은 가장 중요한 당사자 이용준이 작고한 다음해 억지 주장을 하는 건 진실을 왜곡하자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돌아가시고 없는 사위가 훔쳐갔다고 하는 것은 안동의 양반 가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진실은 기존에 알려진 바와 같이 아래와 같습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 가(李漢杰 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국보70호) 그의 선조 이정(李禎: 退溪 李滉 선생님의 증조부 임) 약산성을 쌓고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동국정운(국보71호)과 함께 세종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은 서책 중 하나로 가보로 보관 하다가 우연하게 간송 전형필선생님에게 입수가 되어 비싼 가격으로 매입해 두권 모두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요!
    1943년 6월. 한남서림에 앉아있던 간송이 고서 중개인 [이순황]으로부터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는데,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간송은 거간인 이순황을 통해 책 주인에게 사례비와 구입비용을 주겠다 약속하고서 일련의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경북 안동을 내려가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이용준으로부터 세종임금 시절에 이용준의 선조인 이정(李禎) 공이 여진토벌의 공로로 훈민정음 해례본과 (국보70호) 동국정운 (국보71호)을 하사 받은 책으로 가보로 보관하고 있었고 진성이씨 주촌 대종택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종가의 작은집 李漢杰의 아들 이용준이라는 분이 갖고 있음을 듣고 확인해보니 귀중한 책인 '훈민정음 원본'이었습니다. 즉, 여태껏 이용준이라는 분의 종가에서 대대로 가보로 보관을 해온 것이고 해례본과 동국정운이 함께 간송 미술관으로 가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영남의 대유학자인 이한걸 (李漢杰)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이용준은 학자로서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참고로 이한걸 가(李漢杰 家): 고려 말에 시작된 600년 전통의 진성이씨 안동 주촌(두루) 대종가로 세종 조에 4대 조 이정(李禎)공이 영변판관을 거쳐 최윤덕 장군을 따라 북쪽 오랑캐를 토벌한 공이 있어 한산․선산도호부사를 역임한 종가이다.
    이한걸의 백부 이긍연(李兢淵)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으로 주촌 대종가 종손이셨습니다. (사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발견 당시에 이한걸 가는 종가의 작은집입니다. 주촌 종가와 이한걸가는 직전4대에 걸쳐 양자관계가 3번에 걸쳐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장 당시에 작은집과 큰집 이였기에 서고의 책은 물론 재산의 개념도 분리되지 않았고 주촌 종가 집 서고는 진성이씨 지손들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었습니다.

    *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김언기는 (1520~1588) 자(字)가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평생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3. 작성자 대표 이미지
    虛像
    2017.02.28 11:48
    해례본 간행과 발견에 대한 년도별 요약
    1443년 (세종25년) 12월30일: 훈민정음 발표
    1446년 (세종28년): 훈민정음 간행 (해례본)
    1448년 (세종29년) 9월 29일: 동국정운(한자음의 훈민정음 표기법) 완성
    1448년 11월: 동국정운 발표
    진성이씨 선조 이정(李禎: 생몰 미상 (세종~세조), 진성이씨 대종가 주촌 종택 不遷位이며 退溪 李滉선생님의 증조부 임) 공이 세종 때 여진족을 물리친 공으로 해례본과 동국정운을 하사 받은 것으로 추정
    1520년: 긍구당 유일재 김언기(1520~1588) 선생 탄생, 세종대왕(1397~1450) 사후 70년 지남 (퇴계 이황 선생님의 제자)

    1921년: 사비로 민족고유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덕전강사(德田講社)를 설립 “동릉학술강습소” 개소
    1927년: 이한걸 여자소학 (한글로 교육한 여성용 소학) 만들어 발간 (해례본과 동국정운을 이용 교육 추정)
    1933년 9월: 이용준 (당시18세) 김남이(긍구당 女) 와 결혼
    1940년: 해례본과 (국보70호) 동국정운(국보71호) 간송 전형필선생께 매매
    2004년: 이용준 북한에서 사망 추정
    2005년: 박영진 (긍구당 지인) 긍구당 소유 주장 학술지 발표
    위 년도를 보면 긍구당이 소장할 수 있는 서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영진의 주장이 근거도 없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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