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

Story/효성



‘기술 들어갑니다.’

국내 모 통신사의 광고 캠페인 카피입니다. 자사의 통신기술이 일상 곳곳에 들어가 있음을 친근하고 직관적인 화법으로 홍보한 언표입니다. 이 카피처럼, 기술은 늘 일상으로 들어가고 (기술이 발전을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일상에 들어와 있는 기술들이 영화나 공연 같은 감상의 대상처럼 느껴지신 적 혹시 없나요? 일례로, 전기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전기가 어떤 기술에 의해 발전소와 송전소를 지나 내 방까지 당도하는지는 자세히 알기 힘듭니다. 알지 못한다고 전기 사용에 불편이 따르는 것은 아니죠. 전등이 켜지고 스마트폰이 충전되는 장면을 가만히 ‘감상’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기술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는 걸까요?

대체 어떤 모습으로 우리 일상을 바꾸고 있는 걸까요?



몇몇 기술들은 감상보다 좀 더 능동적인 태도를 요하기도 합니다. 나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듯해서, 잘 보이지도 체감되지도 않는 그런 기술 말입니다. 관객들이 어려운 영화와 공연을 이해할 때 평론가들의 해석을 참고하듯, 기술 사용자인 나 역시 이 ‘기술’이라는 대상에 대해 전문가들의 비평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한 달에 한 권’ 코너에서는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기술비평’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를 소개해드립니다. 



사진: 교보문고




 기술 들어갑니다, 비평도 들어갑니다


이 책의 차례 구성은 크게 3부입니다. 공저자 세 명이 1부씩 글을 썼습니다. 임태훈(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기초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이영준(계원예술대학교 아트계열 융합예술과 교수, 기계비평가), 홍성욱(한밭대학교 화학생명공학과 교수, 적정기술연구소장)이 각각 ‘디지털 비평’, ‘기계비평’, ‘적정기술’ 분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기계비평은 이 책의 공저자 이영준이 국내에서 처음 개척한 비평 장르로, ‘기계 비평’이 아닌 ‘기계비평’으로 붙어 쓰여서 고유명사로 표기되는 용어입니다. 



1부. 디지털 중세기를 탈출하기 ― 디지털 비평

인터넷 바깥의 인터넷 / 블록체인과 분산형 네트워크의 도전 / 인더스트리 4.0과 부스러기 노동을 넘어 / 암호전쟁과 국정원 / 1인 가구를 위한 미디어스케이프 /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디지털 신자유주의, 구체제의 지옥도 / 게이미피케이션 사회 /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문학의 협업 /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주


2부. 온몸으로 기계를 이해하기 ― 기계비평

인간과 기계의 궁극의 각축장, 잠실야구장 / 수술실, 인간이 기계로 환생하는 방 / 지하철역, 21세기 도시인의 생활 리듬을 책임지는 곳 / 기계 연못의 전설, 강북아리수정수장 / 빌딩은 나무다, 그랑서울 빌딩 / 종이책에서 의미의 근원을 찾다, 문성인쇄 / 공연의 역사를 새로 쓸 기계장치, 아시아예술극장 / 조리, 혹은 조립되는 음식 / 마지막 뗏목 사공을 찾아서 / 굴뚝 없는 영화공장, 남양주종합촬영소 / 주


3부. 인간의 눈으로 기술문명 바라보기 ― 적정기술

적정기술의 세 줄기 / 물은 생명이다 / 핵발전소가 필요 없는 에너지 / 농가 빈곤을 해결할 기술을 찾아서 / 생명을 지키는 적정기술 / 종이의 무한한 변신 / 21세기의 혁신, 주가드 이노베이션 / 적정기술 개발의 세 가지 렌즈 / 아카데미아에서 꽃핀 적정기술 운동 / 공감과 창의력을 기르는 적정기술 교육 / 주


대담.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지지할 것인가?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는 “우리 시대의 기술 문화를 진단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한다”라는 기획 의도로 집필되었고, 아래와 같은 문제의식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려는 책입니다.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환경의 내밀한 실체를 반영한다.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힘에 기술이 어떻게 뒤섞이는지 탐구해야 한다. 

_ 「책을 펴내며」 중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힘에 기술이 어떻게 뒤섞이는지”라는 궁금증은, 앞서 인용한 표어인 ‘기술 들어갑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 즉 ‘들어간 뒤 뒤섞이는’ 기술적 다반사를 톺아보는 첫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홰의 횃불, 촛대의 촛불, 가스램프의 가스 불, 전등의 전깃불, ···

‘불 켜기 기술’은 불과 등화 도구뿐 아니라 우리 일상도 변화시켜왔습니다.

이처럼 기술은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뒤섞이고 있죠. 

사진: Wikipedia




 테크놀로지 가이드북 활용법


이 책은 기술비평서이면서,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테크놀로지 가이드’입니다. 테크놀로지 가이드북인 셈이죠. 1·2·3부 각 열 편씩 총 서른 편의 글들이 실려 있는데, ‘기술 문화’라는 지형도 위에 자리한 서른 곳의 여행지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이 안내하는 ‘여행’ 방향은 디지털(1부)·기계(2부)·적정기술(3부) 세 군데입니다.(3부 다음에 부록처럼 이어지는 저자들의 대담은 ‘기술 문화 여행 가이드들의 토론 방’이랄까요.)  어느 쪽을 먼저 가든 괜찮을 것입니다. 다만, 이 테크놀로지 가이드북의 도움으로 먼저 ‘여행’을 다녀온 입장에서 팁을 드리자면, 2부 기계비평 부분부터 읽기를 권합니다. 


기계라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형태로 실체화한 기술’이라 정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종 디지털 기술(1부)이나 세계의 다양한 적정기술(3부)에 비하면, 나의 일상에서 좀 더 잘 보이고 만져지는 ‘기계’를 첫 여행지로 삼는 편이 어떨까 합니다. 특히 2부는 필자 이영준이 직접 취재하고 체험한 기계들 및 기술자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서, 이 책의 핵심 키워드인 ‘기술 문화’를 생생히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컨테이너선이라는 거대 기계에서 뗏목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뗏목의 물길과 컨테이너선의 바닷길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물자 실어나르기 기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면요.




 기술적으로 맛 좀 보실래요?


2부에 수록된 기계비평 한 편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조리, 혹은 조립되는 음식」이라는 제목의 글로, 패스트푸드와 그것을 만드는 기계, 그리고 그것을 먹는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국내 모 햄버거 매장을 찾아가 주방의 일들을 꼼곰히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패스트푸드를 “집밥과 존재론적으로 다른 음식”이라 규정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면 전자회로가 내장된 전기밥솥이 프로그램에 따라 밥을 해주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리워 하는 밥의 형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 사람들은 기계로 만든 음식을 원한다. 빠르고 정확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_ 216쪽



햄버거 매장의 주방 안에는 패티와 번을 굽고, 각종 재료들을 튀기고, 적정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다양한 기계들이 작동 중입니다. 필자는 이 기계적 광경을 “기계와 기계 사이에 사람이 인터페이스로 끼어 있다”라고 다소 거칠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햄버거 만드는 과정이 ‘조리’가 아니라 ‘조립’으로 불립니다. 



기계로 만들어지는 음식답게 (···) 재료들을 모아서 햄버거를 만드는 행위를 ‘조립’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 개입해 있는 기계들은 회로를 이루고 있어서 식재료들이 그 회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완성품이 돼 있다. 

_ 219쪽



규격화된 번과 페티 사이즈, 매뉴얼화된 재료 종류와 열량, 기계 장치에 의해 유지되는 신선도.

햄버거는 필자의 취재 결과대로 정말로 ‘조립’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립형(?) 먹거리는 햄버거 매장뿐 아니라 마트나 편의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된장찌개부터 육개장, 미역국, 김치찜, 낙지볶음밥, 삼계탕에 이르기까지, 4~5분의 조리 시간만으로 혼자서도 간단히 해 먹을 수 있게 ‘세팅’된 음식들 말입니다. 1인 가구 증가와 함께 가정용 패스트푸드 상품들도 다양화되고 있죠. 필자의 표현처럼 “먹거리가 고도로 산업화되고 기계화된 풍경”이 어느덧 우리 일상에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풍경 속에서, 우리의 먹거리 문화는 어떻게 변할까요? 아니 그보다, 우리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이렇게까지 산업화되고 철저히 체계화된 음식을 먹고사는 오늘날 우리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도 기계인가? 이제 음식에 대한 철학도 바뀌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집밥이 아니라 정확성과 체계성이 보장해주는 위생과 영양이다. ‘집밥’이란 상징적 표상일 뿐이다. 

_ 225쪽




 비평이 필요한 이유


비평의 대상을 비평가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나’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좋은 비평이 갖춰야 할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라는 기술비평서는 주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캐릭터 ‘오퍼레이터’는 가상현실 세계의 

각종 기술 코드를 읽어냄으로써, 주인공 ‘네오’에게 현 위치와 탈출구를 알려줍니다. 

기술 문화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런 ‘오퍼레이터’가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사진: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테크 트렌드’라는 말이 흔해진 요즘. 무작정 트렌드만 좇다가는 광활한 기술 문화 지형도 위에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여긴 어디?’ 다음에 오는 말, 다들 아시지요. 지도 앱을 실행시키듯, 기술비평서 한 권을 펼쳐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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