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인문학]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빨간 사과, 그리고 ‘표상’

Story/효성


요즘 <슬기로운 의사 생활> 보시는 분들 많죠? 종합병원 의사들의 의료 활동과 우정, 연애담 등을 따뜻하고 유쾌한 시선으로 그린 의학 드라마입니다. 왠지 현실의 의사들도 극 중 익준·송화·준완·정원·석형처럼 인간미가 넘칠 것만 같아요.


2007년 방영된 <하얀 거탑>도 의학 드라마입니다.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야욕과 권력 투쟁을 다룬 서늘한 작품이죠. 특히 주인공 장준환 선생의 표독스러움이 압권이었습니다.


두 드라마가 묘사하는 병원과 의사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어떤 작품을 보느냐에 따라, 시청자들은 병원이라는 공간과 의사라는 전문인들에 대해 판이한 이미지를 갖게 되겠죠. 이를 인문학적으로는 ‘시청자들이 표상 활동을 했다’라고 표현합니다.


 병원이라는 공간, 의사라는 전문인에 대한 전혀 다른 ‘표상’을 보여주는 드라마 두 편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하얀 거탑> | 출처: tvN, MBC



-
내가 그린 세상의 모습, 표상


표상은 ‘겉 표(表)’와 ‘모양 상(象)’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단어 그대로 ‘겉모양(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양)’을 뜻하죠. 그런데 이 뜻풀이에는 생략된 구절이 있어요. 바로 ‘내가 그린’입니다. 그러니까 표상은 ‘내가 그린 겉모양’을 의미해요.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하얀 거탑>을 본 시청자들은 병원과 의사에 대해 특정한 겉모양(이미지), 즉 표상을 그리게 됩니다. 표상 활동을 한 거죠.



데카르트가 진리의 척도로 ‘나’라는 주체를 제시한 이래, 세계는 주체가 그려 나가는 그림, 주체가 세운 상(표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_ 서동욱 저 『생활의 사상』 중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그의 이 명제[라틴어로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 합니다]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데요. 표상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으로서, ‘나는 표상한다(나의 생각으로 세계를 그린다). 고로 나는 그 세계 안에서 존재한다.’라는 도식을 세웁니다.


그런데 표상이라는 거, 과연 믿을 만할까요? 모든 의사들이 익준이나 준완이처럼 친근할 리 없을 테고, 장준환처럼 야욕가일 리도 만무합니다. 시청자들도 이 점을 잘 알죠. ‘에이, 저건 드라마니까 가능하지~’ 같은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자신의 표상 활동을 의심해보는 것이랄까요. 그래서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습니다.



서구적 주체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인식론적 질문에서 보듯 늘 진리를 주체(나)에 매개하고자 했다. 이 말은 곧 이성의 법칙에 진리를 매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성에 매개된 진리, 즉 나의 마음속에 그려진 세계의 그림(표상) 바깥엔 아무 것도 없는가?

_ 서동욱 저 『철학 연습』 중



데카르트에 이어 이번엔 칸트가 등장했네요. 그가 주창했던 철학적 개념들 중 ‘선험적 인식(경험을 앞서는 인식)’이라는 것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노래 한 소절을 불러볼게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이 가사는 왜 말이 될까요? 사과 대신 바나나를 넣으면 왜 말이 안 되는 걸까요? 우리 머릿속에 이미(선험적으로) 들어 있는 ‘빨간색’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잘 익은 사과 껍질과 유사한 색깔을 우리의 인식 체계는 ‘빨간색’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죠. 그런데요,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는 정말로 빨간 걸까요?


이 사과, 누군가에게는 ‘빨간색’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중 ‘데어데블’이라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대신 초인적 청력을 얻었죠. 그는 소리의 파동과 촉각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데어데블이 그리는 세계의 그림, 즉 표상은 일반인들과는 완전히 다르죠. 데어데블에게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는 절대로 ‘빨간 것’일 수가 없습니다.


위 인용문의 저자는 “나의 마음속에 그려진 세계의 그림(표상) 바깥엔 아무 것도 없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데어데블이 답을 해줄 수 있을 듯하네요.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진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의 ‘빨간’ 표상 바깥엔, 음파와 촉각만으로 그려진 새로운 표상도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청각과 촉각만으로 세상을 보는 히어로 데어데블.
그는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의 ‘빨간’ 표상 바깥을 볼 수 있죠.
즉, 데어데블은 세상을 ‘비표상적’으로 바라봅니다.
출처: IMDB.com



-
표상 바깥을 보기, 비표상적 사유



(···) 전체 세계는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 세계에 속하고 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이처럼 주관에 의해 조건 지어진 상태에 있으며, 주관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세계는 표상이다.

_ 쇼펜하우어 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홍성광 옮김) 중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 “세계는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라는 구절이 상당히 냉소적인데요. 100명이 있으면 100개의 주관적 세계가 있겠으나, 제삼자의 시각에선 그저 100가지 객관적 세계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왠지 쇼펜하우어의 저 말들은 “세상에 겁먹지 마세요”라고도 읽힙니다. 절대적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의 기준들, 그 기준들을 제시하는 누군가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등등도 결국 “주관에 의해 조건 지어진 상태”, 즉 수많은 표상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과를 보고 빨갛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 그러니 겁먹지 않아도 된다, 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물론 이는 우리 스스로가 그린 표상 또한 “객관”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의 ‘빨간’ 표상 바깥을 볼 수 있을 때, 즉 한 가지 표상에만 얽매이지 않을 때 한 사회의 다양성은 점차 확대되겠죠.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선 긋지 않고 한껏 융합하는 세상이 열리는 겁니다. 오늘날 철학가들이 ‘비표상적 사유’를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비표상적으로’ 타인과 관계 맺고 연대한다면, 노랫말처럼 ‘모진 이 세상도 참 살아갈 만할 거예요.’(가수 윤종신의 ‘환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