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철도원"처럼 눈 가득한 훗카이도 여행을 국내에서도 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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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는 욕구는 우리 삶을 앞으로 굴러가게 하는 연료입니다. 삶의 한 부분을 이루는 여행은 많고 많은 ‘싶다’ 중에서 ‘가고 싶다’가 되겠네요. 제게도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습니다. 오로라로 채워진 북극 지방이 그렇고, 신비의 이스터섬이 그렇습니다. 그곳들이 몇 년째 ‘가고 싶은’ 상태에만 머물러 있는 이유는 시간이나 비용의 제약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이번 주말에라도 찾을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리스트에만 고이 모셔둔 곳도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홋카이도’ 지방이지요.

영화나 책을 통해 접하는 ‘홋카이도’는 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말로 설국이지요. 오래전 만난 [러브레터]의 한 장면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하얀 눈밭 위로 퍼지던 히로코의 간절한 외침.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호로마이역에서 깃발을 흔들고 호각을 불며 눈덮힌 플랫폼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철도원]의 오토마츠.


 
내 눈(目)으로 직접 홋카이도의 눈(雪)을 확인하기도 전에 [러브레터]와 [철도원]이 다가왔고, 어느새 환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환상이 깨질 것에 대한 두려움은 가까운 나라 일본의 어느 한 지역을 남극의 어디 끝에 멀리 데려다 놓습니다. 쉬이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도록 말이죠.

그 환상은 달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먹먹하다는 편이 맞겠네요.

“당신은 이렇게 죽은 딸도 깃발을 흔들며 맞이하는군요.”
“난 철도원인걸, 어쩔 수 없잖아. 깃발을 안 흔들면 기차 운행이 제대로 안 되는 걸.”
“당신 아이가, 유키코가, 눈처럼 차가워져서 돌아왔어요.”

홋카이도 추운 지방의 작은 역에서 역장으로 살아가는 오토마츠, 눈이 많은 어느 날 그의 어린 딸 유키코는 감기에 걸리고 뒤늦게 병원에 가보지만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옵니다. 아버지 오토마츠가 깃발을 흔들며 인도하는 기차를 타고서. 아내 시즈에는 그런 남편을 원망하죠. 훗날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조차 오토마츠는 역을 지키느라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합니다. “나는 철도원이니까”라는 오토마츠의 말을 통해 삶에 대한 먹먹함이 전해옵니다.  



강원도 인제에 있다는 곰배령을 찾았습니다. 강원도에서도 눈이 유독 많은 곳이지요. 전기가 들어온 지 불과 십 년 밖에 되지 않은 오지마을이기도 하고요. 자동차의 진입도 수월치 않은 곰배령은 사방이 눈천지입니다. 차창을 통해 바라볼 땐 햇빛에 반사되어 예쁘게만 빛나던 새하얀 눈, 막상 직접 마주하고 보니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등산화에 체인젠을 착용하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보지만 두 다리는 눈 속에 푹푹 빠집니다. 기어이 눈길에 엉덩방아를 찧고 맙니다. 내 생에 이렇게 많은 눈을 보기는 처음이네요.



점봉산을 오르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삶을 닮았다고. 핑크빛 미래만 놓여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막상 살아보니 삶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지치게도 하고 넘어지게도 합니다. 차창 안에서 바라만 본 풍경과 걸어 들어와 경험한 세상이 다른 것처럼. [철도원]의 오토마츠도 그랬겠지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예쁜 아기를 얻는 기쁨도 잠시, 눈발에 어린 딸을 잃고, 아내마저 보내고 나서도 철도원의 자리를, 그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지켜가야만 했던 삶에 어찌 아픔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느덧 정상, 탁 트인 평원이 나타납니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설악산 대청봉이야, 저기는 소청봉, 그리고 저건 중청대피소.”
함께 갔던 일행이 손가락으로 산자락을 가리킵니다. 올라오는 내내 보이지 않던 설악산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거지요. 눈 속에 파묻힌 고요한 세상, 오지마을 곰배령도 실은 굽이굽이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겁니다. 오토마츠도 그 힘으로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기차역을 끼고 함께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철도원 생활을 같이 하며 늙어가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때론 원망스러웠겠지만) 그가 지켜야 할 호로마이역과 기차가 있었기에 살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의 생, 아픔은 있었을지언정 불행한 삶이었다 할 순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행복하다. 잘한 게 없는 데도 모두 내게 잘해주니”. 삶이란 게 그렇지요.



겨울엔 온통 눈뿐인 곰배령은 여름이 되면 야생화 천국이 된다고 합니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야생화의 물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햇살은 또 얼마나 따사로울까요. 그 때도 설악산 은 여전히 인자한 낯을 하고 곰배령을 굽어보겠지요.

야생화의 계절이 오고 나면 곰배령을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무거운 등산복과 체인젠을 벗어버리고 점봉산을 오르며 삶에 대해 생각해 보렵니다. 삶에는 시린 겨울만 있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떠올리렵니다. 홋카이도와 닮았을 것 같은 곰배령을 다녀오고 나서도 여전히 히로코와 오토마츠의 홋카이도를 방문할 용기는 나지 않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세상엔 깨고 싶지 않은 환상도 있는 법이니까.


끊임없이 이어진 레일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씩씩하게 살아라
====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중에서 ====